Marc Chagall Review

"나는 마르크입니다. 감성은 예민하고 돈은 없지만, 사람들은 내게 재능이 있다고들 합니다." - 『나의 삶』, 마르크 샤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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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갈은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무엇이든 했다. 오이도 겨우 한 조각밖에 살 수 없었고, 청어도 한 마리르 사면 하루는 머리를, 다음날은 꼬리를 먹었다. 초기 파리 시절에 완성한 작품들을 보면 당시 샤갈이 얼마나 가난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림들은 대부분 한번 사용한 캔버스에 덧그린 것이다. 샤갈은 낡은 캔버스 위에 빛과 어둠의 대비를 능숙한 솜씨로 처리했다. 낡은 캔버스를 재사용한 것은 재정적인 어려움 때문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그 자체가 하나의 표현수단이 되었다. 사실 이러한 표현방법은 입체주의자 특유의 화법이었다.

본성(interior) 2,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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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 나는 반드시 파리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의 예술의 뿌리를 기름지게 했던 토양은 비프테스크였다. 그러나 나의 예술은 나무가 물을 필요로 하듯이 파리를 필요로 했다. 내가 고향을 떠날 다른 이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나는 내 그림 안에 항상 진실이 남겨질 것을 믿었다." 

"그러나 어쩌면 나의 예술은 미치광이의 예술이고, 그저 반짝이는 수은, 그림에서 솟아난 우울한 영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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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마을,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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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개인적으로 과학적인 목표가 예술에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인상주의와 입체파는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예술은 무엇보다도 먼저 영혼의 상태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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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시 반 (시인),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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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7월 25일, 샤갈은 몇 년 동안이나 멀리 떨어져 지내야 했던 벨라와 결혼했다. 좀더 나은 집안에서 사위를 얻고 싶었던 벨라의 부모는 두 사람의 결혼을 반대했었다. 그러나 9개월 후 귀여운 이다가 태어나자 그날로 그런 욕심은 사라져버렸다. 시대는 혼란스러웠지만 젊은 부부는 행복했다. <생일>은 두 사람의 행복을 증명한다. 샤갈은 소파쿠션이나 테이블보의 무늬를 세심하게 그려 넣었다. 그는 방안의 모든 집기를 정확하게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이 그림은, 파리 시절의 그림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상상해서 그린 것이 아니다. 실제로 존재하는 현실이다. "나는 그냥 창문을 열어두기만 하면 됐다. 그러면 그녀가 하늘의 푸른 공기와 사랑과 꽃과 함께 스며들어 왔다. 온통 흰색으로 혹은 온통 검은색으로 차려입은 그녀가 내 그림을 인도하여 캔버스 위를 날아다녔다"라고 샤갈은 기록한다. 샤갈은 '흐르다' '스며들다' '날아다니다'와 같은 낱말들을 써서 벨라에게서 느낀 유쾌한 기분과 행복을 시적으로 표현했다. 그림 속의 두 사람은 보는 사람이 현기증을 느낄 정도로 중력에서 자유롭다.
엄밀히 말하면, 시적 은유를 시각적으로 옮긴 그림이다. 즉, 언어 개념을 회화 이미지로 충실히 표현한 것이다. 샤갈의 작품에는 '시(詩)'라는 꼬리표가 붙는다. 글로 씌어지거나 시각적 언어로 그려진 작품들이 그것을 검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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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갈에게 혁명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 혁명 후 몇 해 동안 그는 불안한 상태로 지낼 수밖에 엇었다. 국가의 심장부인 수도에서 그는 시대에 뒤떨어진 제정러시아 정부에 대항항는 혁명이 시작되는 것을 지켜보았다. 세상을 뒤집어놓은 열흘이 지나자, 상트페테르부르크는 공산주의자가 장악하게 되었다.
혁명 초기에는 예술이 높게 평가되었다. 보다 나은 인류의 미래를 위해 미학과 정치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기를 기대했기 대문이다. 볼셰비키는 자본주의와 상반되는 그들 정부의 이념과 예술이 서로 의존하여, (진보적이고 아방가르드적인 장점에 의해)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보았다.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오래된 꿈이 현실과 연계된 예술로 대체된 것이다.
의욕으로 가득 찬 샤갈은 전문적인 미학자로서 새로운 지위에 몰두했다. 그는 전시회를 기획하고 미술관을 열었으며, 비테프스크 미술학교에서 수업을 시작했다. 확고한 개인주의자이자 기묘하고 유별난 것을 주장하던 샤갈은, 이름 없는 자들의 권리와 평등을 옹호하기 위해 노력했다. "나를 믿어라. 일단 노동자가 변화하기만 하면, 예술과 문화의 절정으로 돌진할 준비가 될 것이다." 샤갈은 완벽한 공산주의자였다.

the painter to the moon,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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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갈은, 오로지 샤갈만이, 은유가 성공적으로 드러나는 그림을 그린다."
앙드레 브르통은 1945년경 위와 같이 샤갈을 칭찬하면서 시인으로서의 자질을 인정했다. 그러나 초현실주의자의 주창자가 뭐라고 말했든 간에 샤갈과 초현실주의자와의 관계는 깨지고 말았다. 그보다 훨씬 이전에 고향의 민속예술의 근원적인 힘에 자극을 받은 샤갈은 작품 속에 꿈과 환상, 비합리적인 것의 중요성을 발견했다. 초현실주의의 반이성적인 방법은 그 근원에 있어서는 샤갈과 다르지 않았으므로, 초현실주의자들은 샤갈을 자신들의 진영으로 끌어들이려고 했다. 샤갈은 초현실주의자들의 무의식의 힘에 경도되는 것은 미적 가치관의 유행에 영합하여 고의로 비합리성을 과시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여, 자신을 그들과 동일시할 수 없었다. 샤갈의 예술적 신조는 그의 마음속에서 우러난 것이다. "불합리하게 보이는 것을 모두 공상이나 동화로 치부해버린다면, 그 사람은 자연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자신의 꿈에 애착을 느끼고 진실성을 주장하는 일은 샤갈에게는 모순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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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것은 예술이며, 그림이다. 다른 사람의 것과는 완전히 다른 그림. 하지만 어떤 그림이지? 신이나, 내가 모르는 누군가가 내 캔버스에 탄식과, 기도와 슬픔의 숨결, 구원과 부활의 기도를 불어넣어 줄 수 있을까?", 『나의 삶』, 마르크샤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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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살마들을 충격으로 몰아넣은 세계적인 비극이 계속되는 동안 나는 미국에 살면서 일을 했다. 시간이 지나고 나도 나이를 먹었다. 그러나 따뜻하게 맞아준 사람들 덕분에 나는 내 예술의 뿌리를 부정하지 않고, 힘을 내어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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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갈이 그림을 그릴 때는, 그가 잠들었는지 깨어있는지 알 수 없다. 그의 머릿속 어딘가에 혹은 그 밖의 다른 곳에 천사가 있음에 틀림없다.", 파블로 피카소.


이카로스의 추락,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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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예술가들 가운데, 전혀 타협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것을 조화시키는 재능을 가진 사람은 샤갈뿐이었다. 샤갈은 수백 년에 걸쳐 서로 멀어져버린 종교 공동체와 이데올로기, 특히 예술적 이데올로기들 사이의 간극을 메웠다. 샤갈의 통합력은 인간애의 하나인 평화로운 가정과 형제애로 가득한, 평화로운 세계에 대한 사람들의 기원을 만족시켰다. 그의 위로의 메시지는 고대 그리스의 이상향 아르카디아와 파라다이스(천국), 엘리시온(극락)이 하나 된 것이다. 마르크 샤갈은 서로 다른 세계 사이를 여행하는 전령이었다.

"선한 사람이 나쁜 예술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위대한 사람이라도 선하지 않다면 진정한 예술가가 될 수 없을 것이다.", 마르크 샤갈

덧글

  • 715 2013/03/13 09:11 # 삭제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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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라마/쇼프로 본방 챙겨보기 힘들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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