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blo Picasso Review

청색시대는 사실상 <초혼-카사헤마스의 장례>에서 시작되었다. 이 작품은 친구를 떠나보내는 동시에 피카소의 삶에 새로운 창조가 시작됨을 알리는 그림이기도 하다. 피카소는 이 그림을 그린 후 6년 동안 파리의 자유로운 삶을 작품에 표현하지 않았다. 친구 카사헤마스와 바르셀로나를 떠나 파리에 도착했을 때, 피카소는 남이 보는 앞에서도 서슴지 않고 연인들이 키스를 하고 음란한 춤 공연이 벌어지고 풍속이 대단히 자유롭다는 사실에 무척이나 놀랐다. 이런 광경은 보수적인 스페인에서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었다. 둘은 국제도시 파리의 매력에 함빡 취했다. 하지만 단짝친구를 떠나보내고 혼자서 파리로 돌아온 피카소는 더 이상 행복하지도 않고 우울하기 짝이 없었다.
피카소의 모델이자 친구였던 카사헤마스는 애인 제르멘에게 버림받자 파리의 어느 카페에서 자살했다. 1901년 2월의 일이었다. 피카소의 청색시대는 그 해 여름에 시작되었다. 그 사이 피카소는 그림을 그리면서 죽은 친구의 넋을 기렸다. 피카소에게 그림이란 자기 생각을 표현하는 언어이자, 세계를 내면에 받아들여 자기 것으로 삼아 이해하게 해주는 수단이기도 하다. 그에게 있어 이해한다는 것은 바로 관찰하고 의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피카소의 말은 당시 심정을 짐작케 한다.
"나는 카사헤마스가 죽었다는 사실을 의식했을 때 청색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즉, 피카소의 청색시대는 친구의 죽음에서 비롯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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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다. 예술은 언제나 현재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 예술이나 이집트 에술은 과거에 속하지 않는다. 그리스 예술과 이집트 예술은 과거보다도 현재에 더욱 생생하다. 예술가가 표현수단을 바꾼다고 해서 정신이 바뀌지는 않는다.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할 권리가 있다. 이 점은 예술가도 예외가 아니다. 나는 '명상'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실험'을 하지도 않는다. 나는 할말이 있으면 가장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말한다.", 피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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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는 그 감정이 하늘에서 오건 땅에서 오건, 종이조각에서 비롯하건 아니면 지나가는 사람이나 거미줄을 보고 느끼는 것이든 간에, 모든 종류의 감정을 담는 그릇이다. 따라서 예술가는 그 어떠한 감정이라도 차별을 두어서는 안 된다. 세상의 모든 것에는 특별한 고귀함이란 없다. 그래서 예술가는 자기 작품에서만 아니라면 어디에서건 좋은 것을 취해야 한다. 나는 나 자신을 모방하는 일을 끔찍하게 싫어한다. 하지만 누가 아주 오래전 내가 그린 데생을 보여주면 나는 거기에서 원하는 요소를 서슴없이 선택한다.", 피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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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반적으로 볼 때, 작품은 여러 요소들이 서로 분리되어 있다는 느낌을 준다. 서 있는 인물들도 서로 이렇다 할 관계를 맺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피카소는 작품을 네 부분으로 분할해서 삶의 네 가지 모습을 표현하려 했다. 즉, 사랑받지 못하고 자기에 골몰해 있는 고독한 인물과, 서로 부둥켜안은 남녀 한 쌍, 아이를 어르는 어머니가 있고, 그녀와 마주 보고 선 남녀 한 쌍은 육체적 사랑을 구체적으로 표현한다. 피카소는 이 그림에서 사랑의 상실과 획득 사이에 가로놓인 인간의 삶을 표현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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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는 장밋빛시대를 지나고 나서야 대성공을 거두게 되며, 그때 비로소 그의 그림에 점점 더 많은 화상이 관심을 갖게 된다. 그전까지 피카소는 작품들을 쌓아두어야 했다.
이 시기의 그림 중에 <슈미즈를 입은 여인>이 있다. 피카소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할 때부터 끊임없이 초상화를 그려왔다. 그는 연필과 펜, 유화물감으로 그린 수많은 자화상 외에도 아버지와 어머니, 여자 형제들, 페파 아주머니 등의 가족과, 친구들이나 예술가, 양복장이 솔레르, 한쪽 눈이 먼 뚜쟁이 셀러스티나와 화상들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초상화를 그렸다. 피카소가 특히 초상화에 남다른 관심을 기울인 까닭은 관람자를 그림 속으로 끌어들이기에 좋은 장르였기 때문이다. 청색시대가 지나고 1905년이 되었을 때, 피카소의 작품에는 더 이상 고독이나 외로움의 감정이 배어 있지 않았다. 오히려 이 그림의 여인은 몸을 약간 돌린 채 맑은 시선으로 정면을 바라보며 팔을 가지런히 하고 똑바로 서 있다. 마치 자기 자신을 의식하기라도 하는 듯한 표정이다. 물론 청색시대에도 누드화가 있었다. 하지만 당시의 누드화는 시선을 끌거나, <슈미즈를 입은 여인>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성적 매력을 갖추지는 못했었다. 반면 <슈미즈를 입은 여인>은 대단한 성적 매력을 발산한다. 예전 그림들처럼 몸 전체를 가리는 두꺼운 옷이 아니라, 젊고 부드러운 몸이 비쳐 보이는 투명한 옷을 걸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관람자는 배경의 가느다란 색채의 그물과 같은 회화적 섬세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피카소가 예전에 차용하곤 했던 엘 그레코 그림의 장엄한 색채 처리와는 아무런 유사성이 없는 기법이다.
피카소의 청색시대와 장밋빛시대 사이의 차이는 우리가 얼핏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다. 두 시기는 형식상의 차이뿐 아니라 주제 면에서도 무척이나 다른 양상을 보인다. 청색시대에는 거지며 장님, 불구자들이 주를 이뤘던 반면, 장밋빛시대에는 곡예사, 줄타기 곡예사, 어릿광대가 화면을 장식한다. 가난과 우울의 주제가 오락의 주역들로 대체된 것이다. 물론 이런 인물들도 이미 와토나 폴 세잔이 이전 시대에 보여주었듯 슬픔을 간직한 인물들이긴 하다. 하지만 이들의 삶에 어두운 면만 있는 것은 아니므로, 타고난 패자라고 부르기엔 무리가 있다. 당시 피카소는 일만 있는 것은 아니므로, 타고난 패자라고 부르기엔 무리가 있다. 당시 피카소는 일주일에도 몇 차례씩 친구들과 함께 몽마르트의 자기 작업실 근처에 반짝이는 장밋빛 천막을 친 메드리노 서커스를 보러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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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의 장밋빛시대 그림에는 예민한 세대의 실존적 감정이 담겨 있다. 아폴리네르를 위시해 정처없이 여러 도시를 배회하던 많은 이들은, 끝없이 옮겨 다니며 서커스를 하는 사람들에게 남다른 친밀감을 느꼈다. 이들 중 한 사람으로 라이너 마리아 릴케를 꼽을 수 있는데, 그는 뮌헨의 헤르타 폰 괴니히 저택에 기거하면서 언제고 피카소의 <광대들(곡예사 가족)>을 감상할 수 있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연작시 '두이노의 비가' 중 서커스 단우너들에게 바치는 제5비가를 통해 피카소의 그림에 화답한다. 

"그러나 말해다오, 떠도는 이 방랑객들은 누구인지 / 우리들보다 조금은 더 덧없고, 바쁘고, / 일찌감치 서둘러서 (중략) / 마치 기름을 머금은 듯 / 한층 매끈하고, 반들반들한 공기에서 미끄러져 / 낡고 파먹힌 양탄자로 돌아오누나 / 그들만의 영원한 도약으로 - 우주에 파묻힌 / 그 양탄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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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는 고대 미술에 관한 지식을 멋지게 펼쳐보였고, 고전적 전통을 어떻게 시대에 맞게 재현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게다가 피카소는 자기가 원한다면 그 어떠한 미학적 기준에도 맞출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음을 증명했다. 따라서 그 다음 단계로 피카소는 회화적 전통이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피카소는 큐비즘을 통해 회화적 전통에 의심을 던지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회화에 혁명을 가져왔고, 지속적으로 이어져오던 서양 회화의 발전에 종지부를 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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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비즘 회화는 같은 대상을 바라보는 여러 시점을 중앙에 중첩한다. 또한 외부현실을 어떻게 지각하느냐에 따라 작품의 기하학적 구조가 결정된다. 그리고 그 기하학적 구조는 회화 자체에서 출발해 자율적인 형식적 구조로 확대된다. 한편 전통적으로 조명을 통해 회화 속 공간을 안배했던 데 반해, 큐비즘 회화의 캔버스는 요소에 따라 달라지는 빛과 그림자로 분할된다.
큐비즘에 앞서 장밋빛시대가 있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두 시대 사이에는 엄청난 간격이 존재하며, 피카소가 서양 회화에 반기를 들고자 했다는 것을 그 차이를 통해 극명하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현실에 대한 새로운 지각, 진실을 이해하는 새로운 방식을 획득하였기에 피카소는 비로소 낡은 법칙들을 깨버릴 수 있었다. 특히 피카소의 두 자화상을 견주어봄으로써, 이 같은 혁명적 변모의 근저에는 그가 스스로를 바라보는 시선 자체의 변화가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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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식 교육이 제시하는 미의 기준은 잘못된 것이다. 우리는 미에 관해 잘못 배웠다. 완전히 잘못 배워서 전혀 진실의 근처에도 가지 못할 정도다. 파르테논의 아름다움이며 비너스, 요정, 나르키소스 따위는 모두 거짓이다. 미술은 미의 기준을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떤 기준과도 무관하게 우리의 본능과 두뇌가 창안해내는 것이다.", 피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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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몇 년 동안 형태의 와해는 심화된다. 피카소는 작업실에 있는 사물을 대상으로 정물화를 즐겨 그렸다. 사물 자체에 이미 기하학적 형태가 내재해 있기 때문에 관람자는 모양을 어렵지 않게 분간할 수 있다. 비례가 변형되고 형태가 파편화되었어도 표현할 대상은 여전히 식별이 가능하다. 피카소는 이처럼 조각난 형태를 자유롭게 사용하다가 마침내 파피에콜레에 이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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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비즘의 근본적 태도 중의 하나는 현실을 전이하는 것이다. 현실은 더 이상 대상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회화 안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큐비즘 화가가 '과일그릇을 그려 봐야겠다'라고 마음 먹는다면, 그림의 그릇은 실제로 그릇과 하등 관계가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작업에 착수할 것이다. 우리도 사실주의자이긴 했지만, '나는 자연을 따르지 않는다. 나 자신이 자연이 되어 창조한다'라는 중국 격언과 같은 의미에서였다.
리듬을 제외하면, 질감의 차이야말로 자연이 우리에게 경이감을 불러일으키는 가장 커다란 요인 가운데 하나이다. 예컨대 공간에 놓여진 사물의 불투명성과 대립되는 공간 자체의 투명성, 도자기 꽃병 옆에 놓인 담뱃갑의 무광택성, 나아가 형태와 색채, 양감이 질감과 맺는 관계 같은 것이 그런 요소이다. 그런데 왜 이런 차이를 유화의 단조로운 터치로 재현해야 하며, 원근법 따위의 뒤틀린 관습과 수사학을 통해 '표현'하려 애쓴단 말인가? 파피에콜레의 목적은 회화를 구성하는 다양한 재료들이 그림 내에서 자연과 힘을 겨루는 현실이 될 수 있게 만드는 것이었다. 우리는 '정신의 속임수'를 찾아 내기 위해 '눈의 속임수(트롱프뢰유)'를 제거하려 노력했다.", 피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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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는 감수성의 문제가 아니다. 회화는 권력을 찬탈해야 한다. 예술가는 자연이 차지하는 자리를 빼앗아야 하고, 자연이 주는 정보를 져버릴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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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은 어째서 시인들을 공화국에서 내쫓아야 한다고 했을까? 시인이나 예술가는 반사회적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의도적으로 반사회적인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럴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다. 물론 국가는 예술가를 내쫓을 권리를 갖고 있지만, 진짜 예술가라면 스스로 자기가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만일 자기가 하는 작업이 받아들여지고 이해되고 인정받게 된다면, 이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진부한 작업임을 자인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새로운 모든 것, 시도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모든 것은 사람들의 인정을 받을 수 없다. 사람들은 앞을 내다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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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의 <게르니카>는 당시 예술이 갖고 있던 독립성의 한계 내에서 역사가 어떻게 표현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표본적인 예이다. 이 작품에서는 사건을 목격한 증인보다 예술가 자신의 주관적 반응이 부각된다. 왜냐하면 이 작품은 역사적 사실을 묘사한다기보다, 사건이 피카소에게 끼친 영향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게르니카>는 역사의 장에 예술이 참여한 예로서, 20세기의 집단적 의식에 깊이 새겨져 있다. 이 작품은 40년이나 뉴욕에 유배되어 있다가 1982년에 피카소의 고국에 반환되었다. 피카소는 스페인에게 파시즘이 종식된 다음에라야 이 작품이 비로소 스페인 소유가 될 수 있다는 뜻을 남겼었다. <게르니카>가 돌아옴으로써 스페인은 국가의 상정을 얻게 됐다. 현재 이 작품은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에서 영국 은행이 금괴 보호에 쏟아 붇는 만큼이나 삼엄한 보호 아래 전시되고 있다.

"나는 과거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정신적 가치에 따라 생활하고 작업하는 예술가라면 인류 전체와 문명이 위협을 받는 상황에서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예술가란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니까? 화가는 눈만 달렸고, 음악가는 귀만 달렸으며 시인은 그저 리라만 기막히게 연주할 줄 아는 멍청이라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요? 또 권투선수는 어떻고요? 근육만 우람하면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시는지요?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예술가는 정치적인 존재인 동시에 처참한 상황이나 세상의 모든 역경이며 기쁨에 공감할 줄도 알고, 자기 방식대로 세상을 만들어내기도 하는 존재입니다. 사실이 이러할진대 예술가가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무관심할 수 있으며, 무슨 배짱으로 여느 사람들과는 달리 세상에 무심할 수 있단 말입니까? 아닙니다. 그림은 결코 아파트를 치장하려고 그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림은 적에게 맞서서 싸우는 공격과 방어의 무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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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 안으로 들어가 전통으로부터 취할 것을 취하는 자세야말로 피카소의 작품세계를 관통하는 항구적 요소이다. 그는 이전에는 엘 그레코와 앵그르, 세잔에게서 자기 자신의 형식언어를 찾기 위해 자양분을 섭취했다. 그리고 말년에는 대가들의 작품을 체계적으로 모사하려고 했다. 1946년 루브르 박물관은 피카소의 작품과 자크 루이 다비드, 프란시스코 데 고야,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작품을 함께 볼 수 있는 전시회를 기획했다.

"뭔가를 완성한다는 것은 그것을 죽이는 일이며 그것의 생명과 영혼을 빼앗는 일이다.", 파블로 피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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