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마르크스, <마르크스 죽이기> 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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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처럼 지적인 사람이 견딜 수 없는 이 요란함 말고 괴로운 것이 또 하나 있다. 그것은 나 같은 사람이 주위의 구경꾼들에게 혐오감을 주는 구경거리란 사실이다. 저기 지나가는 평범한 사람들, 평범한 시민들, 평범하게 죽어갈 사람들...
귿르은 어디든지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 데나 보지 않는다. 그들은 우리를 본다. 그리고 자신들이 보기 싫은 비참을 본다. 나태를 본다. 오물, 쓰레기, 무소용, 무의미, 무가치를 본다. 모두 자신들이 보기 싫은 것들이다. 
때문에 그들은 우리를 내쫓기 위해서 욕설을 퍼붓는다. 우리를 변화시키려고 충고를 던진다. 어쨌든 그들은 우리가 자신들처럼 노동하며 밥벌이 하기를 원한다. 어쩌면 우리 중에도 그렇게 되기를 희망하는 누군가가 있을지도 모른다. 만약 마음껏 잠을 잘 수 있게만 해준다면 말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우리가 잘 수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이곳에서 우리가 자는 것을 원치 않는다. 우리가 이곳에 있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다른 데 좀 쳐다보라고! 나는 외치고 싶다. 글머 잠시라도 눈을 붙일 수 있으련만. 저 젊은 한 쌍을 보라! 얼마나 보기 좋은가! 아니면 저기 화려한 거리의 예술가를 보라! 참으로 볼 만하지 않은가! 아니면 저기 예쁜 롤라 양은 어떤가!
그런데 아니다. 기차역에 있는 사람들은 우리를 보길 원한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더 이상 우리를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래서 떠돌아다니는 부랑자들을 몰아내기 위한 특별 조치가 내려진다. 기차역을 보기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서다. 관광객이 많이 오는 도시일수록 보기 좋은 기차역은 관광객의 만족도를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도시 마케팅의 냉혹한 경제학에 실망해 기차역을 더난다. 어차피 머물고 싶지 않은 곳이다. 우리는 낯선 도시를 배회하며 잠잘 곳을 찾아나선다. 우리가 쉴 곳은 어디인가? 이 물음은 우리를 끊임없이 불안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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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인간은 인간이 되는 기회를 가져야 한다고 요구한 자는 바로 마르크스였다. 누구든지 스스로를 인간으로서 경험하고 인간으로 존재하는 것이 무엇인지 충분히 의식해야 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나는 언젠가 이렇게 말했었다. 아니면 글로 썼든가. 내가 아니고 엥겔스였나? 아무튼 우리 둘 중 한 명이었다. 그 생각은 바로 이렇다. 인간은 인간으로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배워야 한다. 그 깨우침은 아무나 얻는 것이 아니다. 분명히 아니다. 거리에 돌아다니는 괴물들을 보라. 저 속물들을. 저 깔끔한 커리어우먼들을. 어쩌면 저들은 인간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인식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철저하게 유물론적으로 산다는 것이. 완벽하게 인간으로 산다는 것이.
하지만 사회복지청의 인간 되기 프로그램을 자세히 살펴보면 나는 갑자기 인간이란 사실을 더 이상 자각하고 싶지 않다. 인간이고 싶지 않다. 하여튼 그들이 원하는 인간은 되고 싶지 않다. 운동장 파티 뒤에 남은 쓰레기를 치우는 인간은 되고 싶지 않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공원 벤치에 앉아 직접 재미있는 파티를 벌이고 다른 사람들더러 쓰레기를 치우도록 하겠다. 
(중략) 
우리는 사회인이 되기 위한 준비를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사회 생활에 참여하고 싶지 않다. 참여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사회의 일부가 아니다. 우리는 사회의 저편에 산다. 우리는 세상과 관계가 없다. 주민등록번호도 판매세번호도 사회보험번호도 없다. 때문에 원하지 않는 노숙자 보호소에도 어차피 들어갈 수 없다. 우리는 이곳에 속하지 않는다. 이곳은 다른 사람들의 쓰레기를 치우고 이를 생활의 질이라고 여기는 불쌍한 인간들이 속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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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사랑? 당신 도대체 무슨 소릴 지껄이는 거야?"
아내가 비아냥거렸다.
"당신은 환상 속에서 살고 있어. 당신한테는 감정이나 사랑 아니 인생 자체가 종이 위에만 존재할 뿐이야. 당신은 진정한 삶이 뭔지, 아니 진정한 사랑이 뭔지 전혀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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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적 일을 하려면 규칙적인 리듬이 필요해." 그의 설명이었다.
"창조는 고정된 구조에서만 가능해. 원형은 고정된 틀을 필요로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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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자본주의의 죽음을 의미한다. 만약 언젠가 자본이 스스로를 파괴한다면, 돈의 잿더미로 변한 세상은 사랑으로 다시 꽃필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는 우선 사랑을 배워야 한다. 사랑을 연습해야 한다.
말은 배워야만 이해할 수 있다. 예술은 예술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고 느끼는 것을 배워야만 이해할 수 있다. 그림의 색과 깊이를 알기 위해서는 직접 색을 칠해 봐야 한다. 음악은 음악을 직접 만든 사람에게만 들린다. 음식의 맛은 직접 요리한 사람만이 알 수 있고, 냄새는 냄새를 직접 풍긴 사람만이 맡을 수 있으며, 느낌은 자신을 만지도록 허락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이 하는 모든 행위를 배워야 하는 것처럼 사랑도 배워야 한다. 사랑을 받는 것은 배우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사랑하는 것은 자신을 사랑하도록 허락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과 같다.
(중략)
모든 것이 더 의미 있고 동시에 더 무상했다. 모든 사람의 잘난 모습과 못난 모습이 한꺼번에 보였다. 세상이 한순간에 크게도 작게도 보였다. 나에게는 모든 사람을 끌어안고 싶은 마음과 한 여인만을 품고 싶은 마음 두 가지가 있었다. 나의 뇌는 반짝거리는 생각들로 달아올랐지만 생각은 늘 하나뿐이었다. 바로 제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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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오늘 아침 갑자기 네 명의 가죽 잠바를 입은 청소년들이 들이닥쳤다. 그리고 자신들이 창고의 소유권을 가졌다며 '임대료'를 요구했다. 그렇다. 그들은 분명 임대료라고 말했다.
그들은 돈이라고 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리가 자신들을 이해한다고 확신했다. 이기적 개인은 시민 사회에서 막연한 규정들과 생명이 없는 추상적 개념들 뒤에 숨어 버릴 수 있다. 겉으로는 사심도 욕심도 없으며 오로지 법치 국가에 충성하는 명예로운 시민이라고 거만을 떨지만 작은 바늘로 도덕의 기구를 살짝만 찔러도 저질스런 유물주의가 내뿜는 지독한 방구 냄새가 하늘로 치솟을 것이다.
녀석들은 착각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래서 자신들이 고귀한 동기에서 그리고 더 큰 권한, 말하자면 신으로부터 권능을 부여받아 우리의 돈을 우려낸다고 세상을 속이려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실 그들의 행위는 폭력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이 합법적인 폭력이라고 해도 폭력은 폭력일 뿐이다. 그들은 어떤 관청의 어떤 도장이 찍힌 어떤 종이를 들이밀며 이 창고가 자신들의 소유라고 주장하고 임대료를 요구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그들이 우리에게 폭력을 휘두른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들이 약탈한다는 사실 그리고 우리가 살기 위해 필요한 집을 뺏는다는 사실에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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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텐바흐는 마르크스에 대해 연구하면서부터 지금까지와는 다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존재가 인식을 결정한다" "소외된 노동" "점점 더 많은 것을 욕망하는 자본의 지속적인 축적" 같은 말은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을 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적용된다고 그는 생각했다. 오늘의 현실은 점점 더 예측하기 힘든 콘체른들의 거대 합병, 세계화, 심각해지는 미국화의 이면, 점점 더 악화되는 저임금 직업의 작업 환경, 그리고 감정이 소외된 콜센터의 노동이 특징짓는다.
누구나 자기 행복의 개척자가 될 수 있고, 갑자기 모든 사람이 의미 있는 일을 하며 커다란 부를 가질 수 있다는 신경제의 꿈은 물거품처럼 사라져버렸다. 남은 것은 막대한 빚을 진 이상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은 신경제의 원칙대로 행동했고 이제는 탐욕적인 금융 광대들이 뿌린 씨를 거둬야만 했다. 이 밖에 남은 것은 포스트 신경제의 냉혹한 사업 조건이었다. 내용이나 혁신적인 아이디어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오로지 이윤만이 중요했다. 수익률을 내지 못하는 것은 더 이상 가치가 없었다. 누구도 더 이상 거저 줄 것이 없었다. 그리고 누구도 더 이상 투자하려고 하지 않았다. 리스크란 말은 경제에서 사라졌다. 아니, 사람들은 리스크를 의식적으로 무릅쓰지 않았다. 대신 피할 뿐이었다. 자본주의는 속박되었고 인류는 이윤에 대한 방향을 찾지 못해 질식할 위기에 처했다.
이와 동시에 미래에 대한 걱정과 구동독 발행 채무는 갑작스럽게 사람들을 긴장 속에 몰아넣었다. 사람들은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실존적 불안이란 말을 텔레비전에서조차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 알텐바흐는 세상에 대해 생각하면 할수록 경제 이론을 새롭게 걱정할 때가 되었다는 확신이 굳어졌다. 사람들은 마르크스를 다시 읽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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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하루하루 살아가기 위해 사투를 벌이든 말든 나는 상관하지 않는다. 내일을 걱정하며 진부한 생존 싸움을 하든 말든 내 알 바가 아니다. 나는 더 크게 생각한다. 더 빨리, 더 높이, 더 멀리, 나는 올림픽의 메달을 딸 것이다. 내가 빠진 똥을 금으로 바꿀 것이다. 마지막 종목에서 모두를 물리칠 것이다.
물론 다른 사람들도 자기가 좋아하는 종목이 있다. 자기가 잘하는 기술도 있고 자기 나름의 생각도 있다. 혹 다른 사람이 생계 기반 구축에서 우승을 거머쥘지도 모른다. 나는 그럴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하지만 상관없다. 나는 오직 나만 생각할 것이다. 이것이 역사의 흐름이다. 증가하는 소외다. 증가하는 이기주의다. 증가하는 공격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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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그것은 자신이 혼자가 아니란 사실을 확인하려는 누군가의 망상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하는 일 없이 종일 공원 벤치에 앉아 쫙 벌린 입속에 몇 마디의 말을 털어 넣고 엄지와 중지로 공허한 문장들의 마지막 숨을 쥐어짜낸 뒤 마구 구겨진 낱말 뭉치를 왼쪽 어깨 너머 수풀로 가볍게 던져버리는 누군가의 공상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어떤 사람이 그 버려진 것을 문학의 집게로 집어들고 출판의 휴지통에 넣는다. 그러고 나면 그것은 언어의 쓰레기로서 언젠가 재활용되어 상품 세계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돌아올지도 모른다.
만약 책이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아마 "나는 맥주캔이었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책은 말할 수 없다. 그래서 번번이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아무 말도 못 하고 기만적인 과대 포장에 싸여 있다. 그렇지만 힘 빠지게 만드는 요란한 마케팅의 날카로운 외침을 제외하면 침묵밖에는 할 수 있는 말이 아무것도 없다. 상을 탄 대중문학의 앵무새들은 사치스런 문학관의 연단의 그네에 앉아서 아무런 할 말이 없다.
하지만 그들은 혼자가 아니다. 어쨌든 이 사실을 글의 쓰레기를 통해 알게 되었다. 그들의 사명을 채워주는 대중이 있다. 그리고 책을 사는 대중이 있다. 머리 나쁜 삼류 작가들은 이런 책을 통해 자신이 혼자가 아니란 사실을 확인한다.
뭐, 좋다. 그들은 혼자가 아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지나간 시절의 환영에 지나지 않는다. 아직은 작가가 존재했던 시절의 환영 말이다. 작가, 문학가, 문예가, 오늘날 일너 것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할 필요가 있을까?
그들이 자신의 책을 직접 썼는지 아니면 대필을 시켰는지 알 수 없다. 컴퓨터가 작업의 태반을 해결했거나 인터넷을 이용해 텍스트를 짜깁기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작가는 스스로 창조해야 한다. 스스로 일해야 한다.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존재해야 한다.
오늘날 과연 누가 자기 자신인가? 만약 누군가 어떤 예술적인 행위를 할 때 (예를 들어 표절 없이 작곡을 한다거나 인용 없이 시를 짓는다거나 아니면 캔버스에 자신 있게 물감을 칠한다면) 남아 있는 자아와 만나게 되면, 그는 너무나 놀란 나머지 그가 경험하는 것을 신으로 간주한다.
어느 멍청한 팝 가수라도 신이 내린 영감에 감사한다. 그 영감은 신이 인간의 머리 위에 뿌려준 작은 멜로디의 빗방울이었다. 이 물방울 중 하나가 한 인간을 넘치도록 채웠다. 존재의 거반은 넘칠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적이 되었고 시민성을 피해 도망갔다. 아주 짧은 순간 소외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드디어 자아의 그림자를 가지고 세상 밖으로 나왔다. 처음으로 경험한 자신에게 눈이 부신 주체는 자신의 예술적 객체의 거울 앞에 서 있다. 놀란다. 두려워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이 혼자라고 믿는다.
공원 벤치에 앉아 빈 맥주캔으로 다른 사람들의 존재를 확인하기까지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만약 이를 충분히 오랫동안 하고 있으면 (나는 벌써 꽤 오랫동안 여러 공원 벤치에 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똑똑해지게 된다. 맥주를 마실수록 천부의 재능과 미친 짓의 차이를 배운다. 주체와 객체, 예술과 무대의 배경, 나와 대중 사이의 다른 점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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