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곤 실레는 자신이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진보적인(하지만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다른 학파와 비교할 때 이 그룹은 '전위적'이라는 묘사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룹에 동조하고 있다고 선언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1897년에 분리파가 형성되었고, 요제프 마리아 올브리히가 그들의 전시회 제안서를 작성한 이후 예술에서 진보적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무릇 각 시대가 자기만의 예술을 요구하듯이, 예술은 자유를 요구한다."
루트비히 헤베시의 이 같은 슬로건은 분리파들로 하여금 역사주의에 물든 경직된 관행을 타파하도록 부추겼으며, 이들에게 예술과 삶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이들은 정기 간행물 <성스러운 봄>에 자기들이 추구하는 예술의 목표와 주제, 그리고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수행해야 할 임무 등을 소개했다. 1903년 요제프 호프만, 콜로만 모저, 프리츠 베른도르퍼 등이 창설한 '빈 공방'은 이 같은 미술계의 '봄의 제전'의 메카로 부상했다. 그곳에서 공예는 부활했으며, 인간을 에워싼 모든 환경을 아름다움의 왕국으로 변화시키고자 노력했다. 예술이 병든 인류를 구할 수 있으며, 힘든 현실을 가려주는 미학적 장막을 치는 일은 구원과 다름없다고 믿는 일단의 예술가들에게 구세주 같은 역할을 한 사람은 구스타프 클림트였다. 평론가 베르너 호프만은 "미학적인 면을 중요하게 여기며, 인류의 행동이나 고통보다 아름다움이 중요하다고 믿는 예술적 노력이 불화와 괴로움, 비극을 제거하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이 모든 것에 보편적인 조화를 부여할 수는 있다. 인간의 모든 행동이나 고통을 아름다움으로 장식하고자 하는 예술 경향은 인간에게 그 어떤 불협화음이나 고통의 절규도 야기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와 반대로 이 모든 것을 보편적인 조화 속에 녹일 수 있으리라는 점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논평했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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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림트의 예술을 본받으려는 실레의 시도는 스타일과 모티프의 차용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빈 공방'을 위한 엽서 디자인을 보면, 실레가 최초로 클림트에 대한 경외심을 구체적인 형태로 표현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이상화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쉽게 알아볼 수 있는 형태로 실레는 자신과 스승을 한 그림 속에 그려 넣었는데, 승려 같은 복장에 머리 뒤에서 후광이 비치는 두 남자가 기념비적인 원기둥 위에 서 있는 광경은 예배를 연상시킨다.

<은둔자>라는 제목처럼 그림에서 성자가 아닌 은둔자를 볼 수 있으며, 전체적으로 신비주의적이고, 아련하다기보다 두 남자 사이의 절묘한 균형관계가 표면에 대두된다. 연장자인 클림트는 죽은 듯한 반면, 그보다 젊은 실레는 오랫동안 고독하게 살아온 탓인지 사회에서 고통받도록 선고받은 사람처럼 우울해 보인다. 실레는 수집가인 칼 라이닝하우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구부러진 형태로 표현된 인물들의 우유부단함, 고단한 인생을 견뎌내는 육체, 자살 등 감각적 자극에 경계 태세를 취하는 육체"등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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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레의 작품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그가 상식적인 원근법을 무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가 원근법을 따랐더라면 모델들이 취하고 있는 자세는 훨씬 합리적으로 보였을 것이다. 철저하게 아카데미즘을 배격하고 손끝의 감각에 충실했던 실레는 그림 속에 모델이 비비 꼬거나 왜곡된 모습으로 보일 수 있는 각도와 관점을 고안해냈다. 그의 수채화나 구아슈 드로잉들이 기이하게 보이는 까닭은 반드시 주제 자체나 모델의 심한 노출 때문만은 아니다.
형식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는 실레가 모델들을 화면의 중앙에 배치하며, 이들을 완전히 정면 또는 전면적으로 응시하는 데서 비롯된다. 그의 관점은 매우 다양하며, 그는 매우 낯설고 괴상한 동작과 포즈를 즐겨 그렸다. 그가 관습적인 사물 인식 방식을 흔들어 놓는 데 열중한 사람임을 이해한다면, 때로는 사다리에 올라서서 모델들을 내려다보며 그렸다는 베네슈의 회고담에 그리 놀라지는 않을 것이다.
이처럼 뜻밖의 관점을 통해 작업하는 실레는 그 나름대로의 의도가 있었으며, 늘 클림트와의 비교를 염두에 두었던 그의 의도를 이제 좀더 분명하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클림트가 그린 벌거벗은 여인들은 관찰자의 시선을 전혀 느끼지 않는 듯한데, 이는 실제로 여자들이 혼자 있는 상황에서 그려졌음을 암시한다. 클림트가 그린 느슨하게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자세를 한 젊은 여인들은 자위에 가까운 몽상 속에 빠진 듯하며, 이는 전형적인 남성들의 공상 영역에 해당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누드를 볼 때면 관음주의자가 되는 듯한 기분을 맛보는 것이다. 우리는 매우 은밀한 사적인 공간으로 들어가 우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닌 물체들을 바라본다. 이때 우리의 욕망은 비밀로 간직한 채 상대방의 눈에 띄지 않는 관조자로 남아 있을 수 있다.

반면 실레의 작품은 비슷한 포즈의 누드지만, 어디까지나 화가에 의해 만들어지고 화가의 의지에 따라 보여진다는 느낌을 준다. 그의 작품을 바라보는 눈은, 클림트 작품에서처럼 "욕망을 가장 이상적으로 표현하는 기관"(페터 알텐베르크의 표현)이 아니라, 강제로 옷을 벗긴 채 무방비 사태의 모델들이 취한 강요된 포즈를 바라보는 증인의 눈이다. (중략) 때문에 그의 벗은 모델들은 은밀하다거나, 자기 세계에 몰입해 있다는 느낌을 주지 않고, 오히려 고립되고 잔뜩 긴장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클림트식 관음주의와 실레의 누드 사이의 차이점은 인위적 포즈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실레의 모델들 시선이 우리를 정면으로 향하고 있다는 점 또한 커다란 차이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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뢰슬러를 비롯한 실레의 찬미자들은 초상화적 면에서나 신비주의적 관점에서 지극히 독특한 작품들을 가리켜 "몽유병 환자의 직관이 서려 있는 창작품", "자신의 이성적인 판단보다 훨씬 우월한 작품을 제작하는 데 성공"했다는 말로 극찬했다.
반면 프리드리히 스테른 같은 실레에 대해 회의적인 비평가들은 "지나치게 독창적이고, 난해한 작품 제작에 목마른 나머지 최근에 등장한 사조 중에서 가장 추악한 입체파를 모방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고 비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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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성애의 이미지를 강조한 작품들도 예언자적인 상징주의 부류로 분류할 수 있다. 자화상이나 '니체적' 주제를 다룬 작품들도 그랬듯이, 이 부류의 작품들을 전통적인 의미의 인물화 범주에 대입시켜 이해하기란 곤란하다. 수수께끼 같은 이 작품들은 실레와 어머니의 관계에서 비롯된 구체적인 문제들을 알지 못하고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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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레는 예술가란 무언가 사건이 일어날 것을 예견하고 이를 형상화하는 이중적인 재능을 가진 반면, 일반인들은 예술가가 예견한 사건이 일어난 다음에야 그의 작품을 이해할 수 있다고 믿었으며, 이 같은 견해는 그에게 자기 만족이라는 기분 좋은 전율감을 맛보게 해주었다. 그런데 실레의 전기를 읽어 보면, 예언자적 페이소스를 지닌 그의 사상과 작품들을 전혀 새로운 관점에서 접하게 된다. 그의 이 같은 견해나 작품들은 아버지의 죽음처럼 얼니 시절에 겪은 고통스러운 경험이 누적된 결과물이며, 이러한 경험들은 오래도록 그의 꿈에 등장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시인에 비길 만한 실레의 다음과 같은 문장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모든 사물은 죽어 있으면서 동시에 살아 있다." 이 문장은 전쟁이 시작되기 전 그가 인생에 대해 가지고 있던 견해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아닌게 아니라 실레의 작품이 우울하고 고통스러운 분위기에서 벗어난 것은 1915년부터라고 할 수 있다. 마치 피로 범벅된 전쟁이라는 현실이 그의 고통에 찬 세계관을 완화하고, 이 참혹한 현실을 보상하고, 좀더 건강한 세상을 보여주기 위해 예술가의 상상력이 동원되어야 함을 깨닫게 됐다고나 할까. 이러한 변화는 매우 단순하며 기교적인 구성으로 완성된 자연 풍경이나 도시 풍경을 담은 작품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풍경화나 정물화에서 시작된 이 같은 시도는 그 후 그의 작품 전체에 적용되었다. 클림트식의 장식적인 표현 시기를 잠깐 거친 실레는 장녀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식물이나 사물들이 점차 인간의 형태를 닮아가도록 작업하는 데 전념했다.

"저는 요즈음 열심히 연구하는 중입니다만, 제 생각에 자연을 그대로 베끼는 데생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 보입니다. 저는 기억을 더듬어서 작업합니다. 내 작품들은 풍경에 대한 나의 관점을 보여줍니다. 현재는 나는 산과 물, 나무들과 다른 식물들의 실제적인 움직임을 관찰하고 있습니다. 어디에서나 인간 몸의 움직임에 대해 기억합니다. 절제하기 어려운 기쁨이나 고통의 충동이 식물들에게서도 느껴진다는 말씀입니다. 데생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색을 입힘으로써 새로운 이점들이 생겨납니다. 한여름의 나무 앞에서 가을 나무를 느끼기 위해서는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한 영혼의 울림을 들어야 합니다. 나는 이렇게 우수의 느낌을 그리고 싶습니다." - 프란츠 하우어에게 보낸 편지,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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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예술가는 어떤 경우에라도 자기 자신이어야 하며, 창조자여야 하며, 과거나 전통에 의지하지 말고, 자기 스스로 모든 토대를 닦아야 한다. 이렇게 할 때 비로소 그는 신예술가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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